장대비가 어두운 산허리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 고개, 아름드리 소나무 줄기 사이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작은 종이 등불 하나가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 꺾였다. 진흙탕에 처박힌 등불이 치익 소리를 내며 꺼지자, 숲은 단숨에 먹물 같은 어둠에 삼켜졌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숨이 끊어질 듯 갈라진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번져 나왔다.
"…막… 동아…"
나리를 모신 지 올해로 꼭 십 년째였다.
가을 햇살이 말갛게 내려앉은 그날 아침이, 나리와 함께 걷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한양 도성 남쪽, 숭례문을 빠져나오는 인파 속에서 막동은 물지게꾼의 어깨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제 키보다도 높게 짐을 쌓아 올린 나무 지게가 등줄기를 짓눌렀다. 책 상자에 겨울 옷보따리, 표주박까지 주렁주렁 매단 지게를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주인 윤서겸은 이미 대여섯 걸음이나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빛바랜 회백색 소창의 자락이 가을바람에 스산하게 나부꼈다.
"나리! 좀 천천히 가십쇼! 숨넘어가겠습니다요. 이게 다 나리 짐입니다요!"
막동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외쳤으나, 윤서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러니 네가 지는 게다."
말수가 적기로는 한양 도성에서 첫째가라면 서러울 양반이었다. 정3품 당하관, 홍문관 문신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하루에 스무 마디 넘게 입을 여는 법이 없더니, 며칠 전 궐에서 은밀히 무엇인가를 받아 온 뒤로는 입을 아예 조개처럼 다물어 버렸다.
길가 언덕배기에 우뚝 선 늙은 느티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윤서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지나온 숭례문 쪽을 가만히 한 번 돌아보더니, 소창의 품속에서 누런 한지 봉서를 꺼내 붉은 봉인을 뜯었다. 막동은 얼른 지게 작대기를 땅에 받쳐 세우고는 목을 길게 빼어 주인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렸다. 윤서겸이 눈치도 안 주고 봉서를 슬쩍 기울여 가렸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요?"
"…남쪽."
"아니, 남쪽이 한두 군데입니까요? 남쪽 어디요?"
윤서겸은 봉서를 반듯하게 접어 품에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걸어 보면 안다."
"걸어 보면 알긴… 다리가 알지, 제가 압니까요."
막동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사이, 윤서겸은 행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소매 그늘 속에서 묵직한 구리 패 하나를 반쯤 꺼내 살폈다. 손바닥만 한 둥근 구리 원반 위로 층층이 내달리는 말들의 형상이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든 햇살에 언뜻 번쩍였다.
어깨 너머로 그 구리 빛깔을 엿본 막동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허어, 그게… 말로만 듣던 마패입니까요?"
윤서겸은 대답 대신 망설임 없이 마패를 다시 품 깊숙이 갈무리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
"나리, 저도 딱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깝쇼? 손 깨끗이 닦았습니다요."
막동은 회갈색 무명 저고리 자락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닦고는 조심스레 두 손을 내밀었다. 윤서겸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가 내밀어진 막동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놈이."
"아니, 고을 사또들도 저거 한 번 보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떤다길래… 대체 어찌 생겼나 싶어서요…"
"짐이나 챙겨라."
매정하게 돌아선 윤서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막동은 머쓱해진 손을 거두고 지게 멜빵에 어깨를 끼워 넣으며 혼자 궁시렁거렸다.
"치, 빌려 달란 것도 아니고, 만져만 보겠다는데… 십 년을 등골 빠지게 짐을 져 드렸으면 구경쯤은 시켜 주셔야지. 닳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요."
몇 걸음 앞서가던 윤서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반쯤 고개를 돌려 막동을 불렀다.
"막동아."
혹시나 마패를 보여 주려나 싶어 막동의 둥근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예, 나리!"
"…지게 끈 풀렸다."
막동이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로 왼쪽 지게 멜빵 끈이 반쯤 풀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막동이 허둥지둥 끈을 다시 조여 매는 동안, 먼저 돌아서 걸어가는 윤서겸의 굳게 다문 입꼬리가 아주 실낱같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가는 콧수염과 희끗한 턱수염 그늘에 가려 막동은 보지 못한, 그날 하루 단 한 번뿐인 미소였다.
"…예, 예. 지게 끈이요. 고맙습니다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남쪽 황톳길을 따라 길게 멀어졌다.
그들이 떠나간 느티나무의 굵은 등걸 뒤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깨를 덮을 만큼 넓고 납작한 대나무 삿갓의 오른쪽 챙이 크게 찢어져 꺾여 있었다. 처음부터 나무 바로 뒤에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엿듣고 있던 사내였다. 멀어지던 윤서겸이 아주 짧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길 위에는 가을바람에 구르는 낙엽뿐이었다.
한낮의 남쪽 들길은 누렇게 익은 벼와 은빛 억새가 물결치고 있었다.
앞장서 걷는 윤서겸은 한결같이 등이 꼿꼿했다. 그 바로 뒤를 따라붙은 막동은 지게 멜빵에 짓눌린 어깨가 결리는지, 슬그머니 뒷짐을 지고 턱을 하늘로 치켜든 채 주인의 걸음걸이를 똑같이 흉내 내기 시작했다.
"에헴… 모르는 게 약이다…"
막동은 일부러 목청을 긁어 낮고 근엄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에헴… 걸어 보면 안다…"
앞만 보고 걷던 윤서겸의 입에서 찬물 같은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다 들린다."
화들짝 놀란 막동이 굽혔던 허리를 꼿꼿이 펴며 손을 내저었다.
"바, 발이 저려서 그럽니다요! 발이 저리면 원래 사람이 이리 걷게 됩니다요."
"…발이 저리면 입도 저리느냐."
할 말이 없어진 막동은 나리의 등 뒤에 대고 소리 없이 입술만 삐죽거렸다.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는 아득한 들길 뒤쪽, 억새밭 사이로 찢어진 삿갓 끝자락이 스치듯 어른거리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에야 고개 아래 자리 잡은 초가 주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 주막입니다요, 주막! 살았다!"
막동은 앓는 소리를 내며 평상 가장자리에 지게를 내려놓고 작대기로 단단히 받쳐 세웠다. 마당은 장터에서 돌아오는 길손들로 붐볐다. 오른쪽 콧방울 아래 작은 점이 박힌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터 국밥 두 그릇을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막동의 눈길이 단박에 나리의 국밥 그릇 한가운데에 꽂혔다.
뽀얀 국물 위로 하얗고 동그란 삶은 계란 하나가 탐스럽게 올라앉아 있었다. 막동이 얼른 제 그릇을 내려다보았으나, 파 건더기와 고기 몇 점뿐 계란은 그림자도 없었다. 양반님네 그릇에만 넣어 주는 주막 인심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막동이 숟가락을 들어 허겁지겁 국밥을 퍼 넣기 시작했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윤서겸은 국밥에는 손도 대지 않고 품에서 꺼낸 한문 책자—암행어사의 임무가 적힌 사목(事目)—만 묵묵히 넘겨 보고 있었다.
"나리, 국 다 식습니다요. 얼른 좀 드십쇼."
윤서겸은 대답 없이 사목을 한 장 넘겼다. 막동은 볼이 미어지게 밥을 문 채로 슬쩍 떠보았다.
"안 드시면… 제가 먹습니다요?"
"…고단하면, 한양으로 돌아가거라."
입 앞으로 향하던 막동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으로 넘겼을 말인데, 나리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어쩐지 서늘한 뼈가 들어 있었다. 막동은 잠시 나리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국밥을 한 술 크게 떴다.
"에이, 나리 혼자 가시면 진지는 누가 챙겨 드립니까요. 짐은 또 누가 지고요."
사목에 머물던 윤서겸의 눈동자가 천천히 들려 막동을 향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손도 대지 않은 자기 국밥 그릇을—하얀 삶은 계란이 고스란히 얹힌 그대로—막동의 앞쪽으로 쓱 밀어 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안 드십니까요? 배 안 고프십니까?"
윤서겸은 다시 시선을 내려 사목을 한 장 넘길 뿐이었다. 막동은 그릇과 나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반은 농담처럼 숟가락으로 계란을 콕 찔렀다.
"…진짜 먹습니다요? 나중에 물리기 없기입니다요."
"…먹기나 해라."
그제야 막동은 삶은 계란을 통째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왼쪽 삐뚤어진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도록 볼이 빵빵해진 채 헤헤 웃는 막동의 얼굴 위로, 저물어 가는 가을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빈 쟁반을 거두러 온 주모가 사방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춘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선비님네, 오늘은 길 떠나지 말고 여기서 묵어 가셔요."
"그럼요, 그럼요! 아주머니, 여기 따뜻한 방 하나 주시오!"
신난 막동이 냉큼 맞장구를 쳤으나 주모의 표정은 어두웠다.
"요새 저 고개 넘던 선비님들이… 자꾸 없어진대요."
막동의 손에서 숟가락이 툭 내려놓아졌다.
"…없어져요? 아니, 사람이 어디로 없어진답니까요?"
"그걸 알면 없어졌겠수? 산짐승인지 도적떼인지, 시신도 못 찾는다니까. 밤엔 절대 넘지 마셔요. 꼭이요."
등골이 서늘해진 막동이 나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윤서겸의 시선은 주모가 아니라 주막 마당 구석 평상에 꽂혀 있었다.
그곳에는 찢어진 대나무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사내가 홀로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막걸리 사발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사내는 윤서겸의 시선을 느꼈는지, 탁자 위에 상평통보 몇 닢을 소리 없이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갯길 쪽으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막동이 주모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윤서겸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평상 뒤편에 받쳐 세워 둔 막동의 지게로 다가가, 나무 책 상자 뚜껑을 열고 자신의 품에 있던 누런 봉서와 한문 사목 책자를 그 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막동아, 짐 챙겨라."
책 상자 뚜껑을 닫는 소리에 막동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지, 지금이요? 아니, 방금 주모님이 밤엔 고개 넘지 말라지 않습니까요!"
윤서겸은 막동의 곁으로 다가와 상체를 낮추었다. 사내가 사라진 고갯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막동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자, 한양에서부터 붙어 왔다."
막동이 반사적으로 고갯길 쪽으로 목을 돌리려 하자, 윤서겸이 단호하게 눌렀다.
"보지 마라."
막동의 목이 반쯤 돌아간 채 뻣뻣하게 굳었다.
"…여기 묵으면, 앉아서 당하는 게다."
결국 두 사람은 먹구름이 노을을 삼키기 시작하는 주막 마당을 나섰다. 치마폭을 걷어 쥔 주모가 버선발로 쫓아 나와 불을 붙인 종이 등불 하나와 주먹밥 보자기를 막동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아이고, 기어이 가시네… 이거라도 들고 가셔요."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고맙습니다요…"
막동이 연거푸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동안, 윤서겸은 주모에게서 종이 등불만 받아 들고 정중히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멀리 산봉우리 너머에서 묵직한 천둥소리가 굴러왔다.
어둠이 짙어지는 고갯길 초입에 들어서자 숲은 금세 서늘해졌다. 겁이 많아질수록 막동의 입은 바빠졌다.
"나리, 아까 그 마패 말입니다요. 구리 패에 말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던데요. …다섯 마리던가?"
"…그래서."
"그럼 그걸 역참에 보이면… 말을 다섯 마리나 내준다는 겁니까요?"
"…역참에서는 그렇지."
막동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났다.
"그럼 나리, 저는 한 마리만 빌려 타면 안 될깝쇼?"
"너는 지게나 져라."
"…말도 짐은 지는데."
막동의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에 앞서 걷던 윤서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두 박자쯤 느려졌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투둑, 종이 등불 지붕 위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빗줄기는 산길을 진흙 수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거운 지게를 진 막동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진흙탕에 발을 헛디뎠다.
"나리… 제발 좀 쉬었다 가시죠. 다리가 제 다리가 아닙니다요."
"…네 다리가 아니면 누구 다리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끼 낀 젖은 바위 위에서 막동의 짚신이 미끄러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과 무릎으로 진흙 바닥을 짚으며 나뒹굴었다. 그 소리에 앞서가던 윤서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는 말없이 손을 뻗어 막동의 젖은 손목을 단단히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손목에서 손을 떼자마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번쩍—!
머리 위를 가르는 섬광과 함께 천지가 하얗게 밝아졌다.
찰나의 번개 불빛 속에, 빗줄기 너머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에 얼굴 없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비쳤다.
윤서겸의 걸음이 얼어붙듯 멈췄다. 평생 흔들림 없던 그의 얼굴에 두려움이 아닌 짙은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따라붙었다."
숨 가쁘게 고갯마루에 올라선 두 사람 앞에 낡은 서낭당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갈림길이었다. 윤서겸은 걸음을 멈추고 막동을 돌아보았다.
"둘이 움직이면, 둘 다 들킨다."
"그럼… 저도 같이 뛰겠습니다요!"
"너는 여기 있어라."
흔들리는 등불 불빛 속에서, 윤서겸은 빗물이 뚝뚝 듣는 막동의 얼굴을, 그 오른쪽 눈썹 위에 자리 잡은 짧은 흉터를 유난히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십 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눈에 담아 두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막동은 공연히 멋쩍어져 손등으로 젖은 볼을 문질렀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요?"
"…아니다."
윤서겸이 고쳐 쥔 종이 등불을 들어 올렸다. 막동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나리, 밤길에 등불을 들고 가시면 어쩝니까요! 불은 두고 가셔요!"
"…불이 있어야 따라오지."
쫓아오는 자들의 눈을 제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윤서겸은 막동의 눈을 피한 채 지게 쪽을 턱짓했다.
"…짐, 잘 지켜라."
"나리—!"
윤서겸의 등불이 왼쪽의 빽빽한 숲길 속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과 폭우 속에 홀로 남겨진 막동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낭당 돌무더기에서 젖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꼭대기에 얹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비볐다.
"천지신명님, 산신령님… 아무나 듣고 계신 분 있으면요… 제발 우리 나리 좀 지켜 주십쇼."
기도를 마친 막동이 눈을 번쩍 뜨고는 등불이 사라진 어두운 숲 쪽을 보았다. 옆에 세워 둔 지게의 멜빵 끈을 말없이 꽉 움켜쥐었다.
나무줄기 사이로 가물거리며 멀어지던 작은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돌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등불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꺼졌다.
완전한 어둠. 빗소리만 귀를 찢었다.
그 먹먹한 폭우 너머에서, 숨이 끊어질 듯 아득한 목소리가 막동의 귓전을 때렸다.
"…막… 동아…"
막동의 숨이 턱 멎었다.
짐을 지키라던 나리의 당부보다 나리의 목숨이 먼저였다. 막동은 쥐고 있던 지게 끈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산더미 같은 지게가 진흙 바닥에 쿵 쓰러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막동은 어둠 속 숲 비탈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나리! 나리이—!"
진흙 비탈을 반쯤 굴러 내려간 곳, 어두운 숲 그늘 사이로 찢어진 삿갓을 쓴 형체가 소리 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비탈 아래 진흙 구덩이에는 불 꺼진 종이 등불이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고, 그 옆에 윤서겸이 쓰러져 있었다. 늘 단정하던 흑립(갓)은 벗겨져 진흙 속에 찌그러진 채였다.
"나리…! 정신 차리세요, 나리…!"
막동이 무릎으로 진흙탕을 기어가 주인의 차가운 손을 움켜잡았다.
윤서겸의 무거운 눈꺼풀이 겨우 실낱같이 열렸다. 빗물이 들이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막동의 오른쪽 눈썹 위 흉터를 마지막으로 담았다.
윤서겸은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제 허리띠 안쪽을 더듬었다. 쪽빛 명주 끈에 매달린 구리 마패를 있는 힘껏 끌어당겨, 막동의 손바닥 위에 꾹 눌러 쥐여 주었다.
"막동아… 그놈들이 찾는 건… 내가 아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쪽빛 명주 끈이 툭, 끊어졌다.
끈 한 토막은 윤서겸의 허리띠에 남고, 나머지 한 토막은 막동이 쥔 마패 윗구멍에 매달렸다. 마패를 쥐여 준 윤서겸의 손이 힘없이 진흙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나리?"
막동이 아주 작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막동은 주인의 차가운 손등을 제 이마에 끌어다 대고 진흙탕 바닥에 엎드렸다. 잘게 떨리던 어깨가 한순간 멎는가 싶더니, 참았던 울음이 둑 터지듯 폭발했다.
막동은 무릎 위 진흙 묻은 바지 자락을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두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드러낸 채 고개를 하늘로 꺾어 젖힌 막동이, 빗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입을 끝까지 벌리고 목청이 갈라져라 울부짖었다.
"나리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이 끅끅 목구멍을 긁으며 터져 나왔다.
"나리… 나리이…!"
그 처절한 울음소리가 오히려 어둠 속의 추격자들을 불러들였다. 비탈 아래쪽 산길에서 붉은 횃불 서넛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거친 고함이 날아들었다.
"이쪽이다!"
막동의 울음이 칼로 자른 듯 뚝 멎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빗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소리 난 아래쪽을 돌아보았다.
"비명이 이쪽에서 났어!"
횃불들이 빠르게 비탈을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막동의 손바닥 안에서 차가운 구리 마패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망치면… 도망 노비. 남으면… 주인 죽인 하인.'
막동이 고개를 떨구어 숨진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명 저고리 고름을 풀려던 찰나, 진흙탕에 반쯤 잠긴 마패 앞면의 다섯 마리 말 중 첫 번째 말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꺼졌으나, 눈물에 시야가 가린 막동은 끝내 보지 못했다.
막동은 제 회갈색 무명 저고리를 벗어 비를 맞는 주인의 시신 위에 정성껏 덮어 주었다. 진흙 속에 굴러다니던 나리의 찌그러진 갓을 집어 든 막동이 엎드린 채로 떨리는 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나리… 이거, 잠깐만 빌리겠습니다."
흰 속적삼 차림이 된 막동은 비탈을 기어올라 서낭당 앞으로 돌아왔다. 내던졌던 지게를 다시 일으켜 메고, 찌그러진 갓을 지게 가지에 걸었다.
"저기! 누가 쓰러져 있다!"
아래쪽에서 터져 나온 외침과 함께 흔들리는 횃불 빛이 서낭당 돌무더기를 비추기 직전, 막동은 고개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 개울가였다.
고개를 넘어온 흰 속적삼 차림의 막동은 지게를 바위 옆에 내려놓고, 개울물을 두 손으로 떠서 허겁지겁 마셨다.
그때 개울 위쪽 산길에서 사내 둘이 지나가는 소리가 안개를 타고 내려왔다. 막동은 숨을 죽이며 바위 뒤로 몸을 낮추었다.
"주막 주모 말이, 그 선비랑 땋은 머리 종놈 하나가 같이 있었다더만."
"그놈이 죽였구먼. 종놈이 어디까지 가겠어."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막동은 잔잔한 개울물 수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땋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머리로는 고개 아래 장터 한복판도 지나갈 수 없었다.
막동은 떨리는 손으로 지게의 나무 책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막동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칫했다.
맨 위에 나리의 누런 봉서와 사목 책자가 놓여 있었다. 막동은 봉서를 집어 든 채, 손 안의 봉서와 열린 책 상자 안쪽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봉서와 사목, 놋쇠 자(유척), 그리고 단정하게 개어 둔 나리의 흰 도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막동은 봉서를 펼쳐 손가락으로 겉면의 글자를 한 자씩 더듬더듬 짚어 읽었다.
"경기… 풍… 곡… 현."
함께 들어 있던 사목 책자도 펼쳐 보았으나,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막동에게 빽빽한 한문 문장은 시커먼 먹물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동은 사목을 덮어 품에 안은 채 남쪽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리가 가시려던 데가, 여기였구나."
살려면 종놈 막동이어서는 안 되었다.
막동은 검정 헝겊을 풀어 십 년 동안 땋아 내렸던 머리를 흩뜨렸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정수리 위에 어설프게 상투를 틀었다.
흰 도포를 펼쳐 입고, 봉서와 사목, 놋쇠 자, 그리고 끊어진 쪽빛 끈이 달린 마패를 품속 깊숙이 갈무리했다. 찌그러진 나리의 갓을 두 손으로 펴서 머리에 쓰자, 개울물 수면 위로 낯선 선비 하나가 비쳤다.
막동은 일어서서 빈 지게를 개울가 덤불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십 년 동안 제 등짝과 한 몸이었던 지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날, 하인 막동은 죽었다.
고개를 넘어온 길가의 한낮, 솔목 장터 주막은 장꾼들로 북적였다.
주막 평상 구석에 흰 도포와 갓 차림의 막동이 홀로 앉아 있었다. 찌그러진 갓 챙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하룻밤 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옆 평상에서 장꾼들이 땀을 흘리며 비워 내는 국밥 그릇을 따라 막동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움직였다. 목울대가 꿀꺽 오르내렸다.
어깨에 행주를 걸친 솔목 주모가 평상 곁을 지나며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국밥 한 그릇에 세 닢이오."
막동은 품에서 엽전 주머니를 꺼내 손바닥 위에 탈탈 털었다.
짤랑.
손바닥 위에 떨어진 것은 상평통보 엽전 딱 두 닢뿐이었다.
한 닢이 모자랐다. 막동은 어제 들길에서 나리의 등 뒤에 대고 연습했던 그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에헴… 외상은…"
그러나 주모의 싸늘한 눈초리에 삼 초도 버티지 못하고 본래의 하인 말투로 무너져 내렸다.
"…안 되겠지요?"
"갓 맡기시든가."
주모가 막동의 갓을 위아래로 훑으며 쏘아붙였다. 막동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머리 위의 갓을 꽉 붙잡았다. 나리의 갓이었다.
당황한 막동이 혹시 동전 한 닢이 어디 끼었나 싶어 빈 주머니를 다시 뒤집어 털고, 도포 품속을 더 깊이 허둥지둥 더듬었다.
쨍그랑—!
엽전 주머니에 딸려 나온 구리 마패가 평상 나무판 위로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다. 끊어진 쪽빛 명주 끈 토막이 달린 채로 구르던 마패는, 다섯 마리 말이 새겨진 앞면이 하늘을 향한 채 딱 멈추었다.
옆 평상에서 막걸리 사발을 들던 아전 차림의 사내, 배 호방의 눈이 마패에 꽂혔다.
"푸웁—!"
배 호방은 입안의 막걸리를 허공에 확 뿜어내더니, 평상에서 굴러 내려와 마당 흙바닥에 코가 닿도록 납작 엎드렸다.
"어… 어사 나리!"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시끌벅적하던 주막 마당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막동은 손바닥에 엽전 두 닢을 쥔 채, 반쯤 일어선 자세로 굳어 버렸다.
[덧붙임 — 십 년 전, 겨울]
눈발이 성기게 날리던 정조 8년(1784년) 겨울, 한양의 노비 거래 마당.
땋은 머리의 열다섯 살 소년 막동이 거간꾼 옆에서 언 손을 비비며 제 입으로 자기를 팔고 있었다.
"저 일 잘합니다요. 밥은 조금만 먹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둘러선 사람들이 일제히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때 인파 속에서 서른 살의 젊은 윤서겸이 걸음을 멈췄다. 귀밑머리에 흰 털 한 올 없던 시절의 그는 소년의 얼굴을, 오른쪽 눈썹 위의 짧은 흉터를 말없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저 아이로 하지."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돌아서는 젊은 윤서겸의 등 뒤에 대고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리, 저… 밥은 먹여 주시는 거지요?"
윤서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짧게 대꾸했다.
"…먹기나 해라."
소년이 씩 웃었다. 삐뚤어진 왼쪽 송곳니와 오른쪽 눈썹 위의 흉터가 눈발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가짜 어사 —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 및 삼정(三政) 문란 고증 노트
- 암행어사 임명장 세트(봉서·사목·마패·유척): 어사로 임명된 당하관 문신은 승정원에서 봉서(封書: 출두할 고을 지명이 적힌 밀봉 문서), 사목(事目: 감찰 수칙서), 마패(馬牌: 역마 징발패), 유척(鍮尺: 도량형 및 형구 검수용 놋쇠 자)을 하사받았다.
- 봉서 개봉 원칙(남대문 밖 개봉): 봉서 겉면에는 '도성 문(숭례문 등) 밖에서 개봉할 것'이 명기되어, 어사 본인도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암행 목적지(경기 풍곡현)를 알지 못했다.
- 세곡(稅穀) 수탈과 되·말(斗斛) 조작: 조선 후기 지방 아전(호방·이방)들은 세곡 수납 시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큰 되를 사용해 백성들의 쌀을 초과 징수(모곡)하고, 어사 감찰 시에는 정상 규격의 되로 바꿔치기해 유척 검수를 피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