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어사
Novel / 가짜 어사 · 무료 공개

제2화. 얼마나 좋아

EPISODE 02 / 03
공백 포함 8,401자 · 약 16분
목차 역사 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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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증 ↓

관아 마당의 흙먼지가 거칠게 피어올랐다.

검은 전립에 붉은 술을 매단 사령 둘이 흰 도포 차림의 사내를 사정없이 흙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내의 머리에서 찌그러진 갓이 비스듬히 꺾이고, 시커먼 육모방망이의 그림자가 정수리 위로 겹쳐졌다.

"어디서 굴러먹던 웬 놈이냐!"

서슬 퍼런 고함이 마당을 때렸다.

무릎이 꺾인 채 흙바닥을 짚고 있던 사내—막동의 덜덜 떨리는 오른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흰 도포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로부터 꼭 하루 전 한낮, 솔목 장터 주막 마당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평상 나무판 위에는 끊어진 쪽빛 명주 끈이 달린 구리 마패가 다섯 마리 말을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었고, 마당 흙바닥에는 비단 조끼를 입은 고을 아전 배 호방이 코가 닿도록 납작 엎드려 있었다.

국밥 뚝배기를 나르던 주모도, 막걸리 사발을 들던 장꾼들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어사래."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며 속삭이는 소리가 장터 바람을 타고 번졌다.

엉거주춤 반쯤 일어선 자세로 오른손에 상평통보 엽전 두 닢을 쥐고 있던 막동은, 눈앞에 엎드린 호방의 등을 보자마자 무릎이 저절로 꺾이기 시작했다. 십 년 동안 양반님네가 호통치면 무조건 엎드려 빌던 종놈의 버릇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탓이었다.

'아이고, 왜 남이 엎드리는데 내 오금이 접히느냐!'

무릎이 반쯤 굽은 채로 멈칫한 막동은 눈알만 데구루루 굴려 사방을 살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제 입술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막동은 슬그머니 굽혔던 무릎을 펴고는 목구멍이 따갑도록 헛기침을 두 번 내뱉었다.

"에헴, 큼… 이, 일어나라."

점잖게 깔려던 목소리가 끝에서 어설프게 갈라졌다.

막동은 누군가 채어 가기라도 할세라 평상 위의 구리 마패를 날름 집어 도포 품속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제야 배 호방이 무릎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조심스레 일어섰다. 호방의 기름진 눈동자는 막동의 얼굴이 아니라 방금 마패가 들어간 도포 품 언저리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기, 기별도 없이 이런 누추한 장터 주막에 행차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소인, 이 고을 호방을 맡고 있는 배가이옵니다."

배 호방은 사방의 장꾼들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었다.

"나리, 여기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사오니… 누추하오나 소인의 집으로 뫼시겠사옵니다."

막동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려 입을 열었다. 관아 아전의 집이라니,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일 있단 말인가. 적당히 둘러대고 도망칠 요량으로 입을 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꼬르륵—!

어젯밤부터 물 한 모금밖에 못 삼킨 막동의 주린 배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열렸던 막동의 입이 그 자리에 박제된 듯 딱 멈췄다. 배 호방은 차마 못 들은 척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옆에서 행주를 쥐고 서 있던 솔목 주모가 눈치를 보더니,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기, 방금 시키신 국밥값은요."

배 호방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제 주머니에서 엽전 한 줌을 가득 움켜쥐어 주모의 손바닥에 수북이 쥐여 주었다.

"여기 있네! 거스름은 넣어 두게!"

막동의 눈동자가 주모의 손에 얹힌 누런 엽전 더미를 홀린 듯 따라갔다. 입안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막동은 엽전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한 채로, 턱만 살짝 치켜들었다.

"…앞장서라."

솔목 장터 길을 빠져나가는 동안, 장꾼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켰다.

앞서 걷는 배 호방의 뒤를 따라가던 막동은 어제 남쪽 들길에서 나리의 등 뒤에 대고 장난치던 기억을 떠올리며 뒷짐을 졌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커다란 나무 짐짝을 진 등짐장수가 걸어오자, 막동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길 가장자리 수풀 쪽으로 비켜섰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호방보다 반걸음 뒤쪽, 늘 나리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던 하인의 자리로 슬그머니 처졌다.

앞장서던 배 호방이 뒤를 돌아보고는 당황해 옆으로 비켜서며 두 손으로 앞길을 권했다.

일 초쯤 어색하게 서 있던 막동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호방의 앞으로 성큼 나섰다. 좁은 어깨를 있는 힘껏 펴 보았으나 소매 긴 흰 도포 자락이 자꾸만 발끝에 밟혔다.

높다란 기와를 얹은 배 호방의 집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막동이 대문 문턱을 넘으려다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넓은 마당 양옆으로 회갈색 베옷을 입은 하인 대여섯 명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일제히 줄지어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남이 내 앞에 엎드린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려던 막동의 시선이 엎드린 하인들의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맨 끝에 엎드린 사내 하나가 이상했다.

어깨까지 덥수룩하게 엉킨 산발 머리에 가는 콧수염이 난, 볕에 그을린 삼십 대 후반의 종놈이었다. 그놈만 혼자 고개를 반쯤 치켜든 채 삐딱하게 막동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실눈이 막동의 핼쑥한 얼굴에서 시작해, 긴 도포 소매 끝으로 살짝 비어져 나온 거친 손마디를 거쳐, 흰 도포 자락 밑으로 드러난 짚신과 쩍쩍 갈라진 발뒤꿈치로 천천히 내려갔다. 십 년 동안 무거운 지게를 지고 땅을 디뎌야만 생기는 하인의 발이었다.

"구렁이 이놈! 어사 나리 앞에서 감히 고개 숙이지 못해!"

뒤따라 들어온 배 호방이 기겁을 하며 사내의 등짝을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구렁이'라 불린 종놈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숙이면서도, 치켜뜬 눈알만은 막동에게서 떼지 않았다.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누렇게 뜬 이가 드러나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히히히."

대문을 들어서며 피어나던 막동의 웃음이 단박에 뻣뻣하게 굳었다. 막동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나리, 누추하오나 사랑채로 뫼시겠사옵니다."

배 호방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안내하더니, 구렁이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구렁이 네놈이 오늘 밤 나리 시중을 들어라. 한 치도 곁을 비우지 말고 정성껏 모셔야 한다!"

"예이~."

구렁이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능청스럽게 대답하고는 사랑채 쪽으로 앞장섰다. 막동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구렁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막동만 들릴 정도로 '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홀로 남겨진 막동은 화들짝 놀라 자기 도포 소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제 개울물과 밤비에 젖었던 퀴퀴한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해 질 녘, 사랑채 방안으로 들어온 소반 하나에 막동의 숨이 멎었다.

나리의 찌그러진 갓을 쓴 채 방석 위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막동은 차마 수저를 들지 못하고 사 초 동안 상만 내려다보았다.

소반 위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봉 쌀밥 한 그릇과 누런 기름이 동동 뜬 진한 고깃국, 간장 양념이 윤기 나게 배어든 갈비찜, 노릇하게 부친 전과 떡이 빈틈없이 올라앉아 있었다.

종놈이란 늘 주인님네가 상을 물린 뒤, 부엌 아궁이 구석에서 식어 빠진 보리밥 찌꺼기에 찬물을 말아 삼키는 목숨이었다. 이렇게 갓 지은 더운 흰쌀밥과 고깃국을 제 앞에 온전히 받아 본 것은 스물다섯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막동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놋숟가락을 들었다가 한 번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을 삼키고는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흰쌀밥 한 술을 크게 떠서 입에 넣고 씹자,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어 두 손으로 고깃국 사발을 감싸 들고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막동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텅 빈 창자를 데우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방문 옆 벽에 쭈그리고 앉아 시중을 들던 구렁이가 그런 막동을 실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국물 사발을 내려놓은 막동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반쯤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네."

"예이~."

"종살이… 좋은가?"

구렁이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 기울이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좋아서 하는 종놈이 어디 있소. 이히."

숟가락을 쥔 막동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십 년 동안 짊어졌던 지게의 무게가 어깨 위에서 다시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만하자고. 남의 상 차리고, 남의 요강 비우고, 남의 짐 지고… 이제 지겹지도 않나.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아 봐야 할 거 아닌가."

실실 웃던 구렁이의 입매가 한순간 뚝 멎었다. 구렁이가 가늘게 실눈을 뜨며 물었다.

"…진심이오?"

막동은 고깃국 그릇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진심이지! 쌀밥 먹고, 고깃국 먹고, 뜨신 방에서 다리 쭉 뻗고 자고… 어릴 때 팔려 간 우리 누이도 찾아다 같이 살고… 얼마나 좋아~!"

절박하게 내지른 외침 끝에 목이 갈라졌다. 얼마나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혔던지, 정수리에 얹혀 있던 나리의 갓이 뒤로 훌러덩 넘어갔다.

막동은 기겁을 하며 두 손으로 뒤로 넘어가는 갓을 허둥지둥 받아 들었다.

갓을 붙잡은 막동의 어깨 너머로, 살짝 열린 방문 틈에 눈을 대고 엿보고 있던 배 호방과 문 옆의 구렁이가 동시에 얼어붙어 있었다.

문밖에서 엿듣던 배 호방이 '아하, 차린 대접과 성의가 마음에 드셨구나!' 싶었는지 소리 없이 제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싶은 막동이 얼른 갓을 바로 고쳐 쓰고는, 어색함을 감추려 상 위의 갈비 한 짝을 집어 입에 덥석 물었다.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희색이 만면해진 배 호방이 두 손을 비비며 슬금슬금 기어 들어왔다. 호방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묵직한 무명 엽전 꾸러미 하나를 소반 밑으로 쓱 밀어 넣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소인의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나리… 저, 관아 장부 일은… 눈 한 번만 딱 감아 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장부 일이 무슨 소리인지 알 턱이 없는 막동은 입에 왕갈비를 문 채로 영문도 모르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배 호방은 얼굴이 활짝 펴져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호방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이 초쯤 정적이 흐른 뒤, 방문 옆에 앉아 있던 구렁이가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낮게 속삭였다.

"…'우리'라고 하셨소?"

막동의 입에서 뜯고 있던 갈비가 그대로 멈췄다.

배 호방도 구렁이도 모두 물러간 깊은 밤이었다.

사랑채 방안에는 촛불 하나만이 외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쯤 치워진 소반 귀퉁이에, 어제 주막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하얀 삶은 계란 하나가 접시 위에 남아 있었다.

막동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습관처럼 계란을 집어 맞은편 아무도 없는 빈자리 앞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늘 나리가 앉아 사목을 넘기던 자리였다.

일 초쯤 빈자리를 바라보던 막동은 혼자 피식 웃으며 계란을 다시 제 앞으로 가져왔다.

"나리, 보십쇼. 고깃국에… 계란까지 나옵니다요. 이히—"

자기도 모르게 구렁이의 웃음소리를 따라 하고는 킥킥거렸다.

막동은 삶은 계란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고소하고 퍽퍽한 노른자가 입안 가득 퍼지자 볼이 빵빵해진 채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바보처럼 실실 쪼개며 웃던 순간, 힘이 풀린 손끝에서 먹다 남은 계란이 톡 떨어져 방바닥 위를 데구루루 굴러갔다.

막동은 허둥지둥 무릎으로 기어가 굴러간 계란을 주워 들고는 흰 도포 소매로 먼지를 쓱쓱 닦아 냈다.

손에 쥔 계란을 내려다보던 막동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어제 해 질 녘, 고개 아래 주막 평상에서 아무 말 없이 계란 얹힌 국밥 그릇을 제 쪽으로 쓱 밀어 주던 윤서겸의 마른 손이 눈앞에 선명하게 겹쳐졌다.

막동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입안에는 아직 삼키지 못한 계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막동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씹다 만 하얀 계란이 다 보이도록 숨을 헐떡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끅, 끅, 갈라진 울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빈자리를 비추던 촛불이 길게 흔들렸다. 방문 밖 창호지 위로 구렁이의 검은 그림자가 잠시 멈춰 섰다가 소리 없이 지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단 이불 위에 드러누운 막동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맡에는 나리의 찌그러진 갓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좋아."

낮의 외침과 달리 한숨처럼 나지막한 속삭임이었다. 고개를 돌려 머리맡의 갓을 바라보자 웃음기가 스르르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방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구렁이가 어둠 속에서 들어와 막동의 이불 곁에 쪼그려 앉았다. 놀란 막동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구렁이는 다짜고짜 막동의 손을 덥석 붙잡아 뒤집더니, 거친 엄지손가락으로 막동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박인 굳은살을 쓱 훑었다.

"양반 손에… 지게 자국이 있네?"

막동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무, 무엄하다."

양반 말투로 목소리를 깔아 보았으나, 구렁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구렁이는 방 한쪽에 물려 둔 소반 위, 갈비뼈가 수북이 쌓인 접시를 턱짓했다.

"그 갈비, 그 쌀… 이 동네 세곡(稅穀) 빼돌린 거요."

배 위에 얹어 두었던 막동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구렁이가 막동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낮게 말했다.

"나도 종놈이오. 날 데려가시오."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냐."

하인 말투가 샜다가 황급히 고쳐 잡는 막동을 보며, 구렁이가 씨익 웃었다.

"싫으면… 내일 아침, 호방 나리 앞에서—"

구렁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까 저녁 막동의 표정과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다.

"얼마나 좋아~! …나 구렁이야아~ 이히히히!"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더니 목을 젖히며 터뜨리는 폭소에, 막동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등잔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음 날 아침, 배 호방은 대문 밖까지 나와 허리를 굽혀 막동을 배웅했다. 그 옆에는 보따리를 둘러멘 구렁이가 서 있었다.

"길 시중은 이놈이 들 것이옵니다."

배 호방은 구렁이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 막동이 못 듣게 속삭였다.

"어디로 가는지, 뭘 묻는지… 낱낱이 기별해라."

"예이~."

구렁이는 호방에게 크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이히히' 웃었다.

어사가 길 시중드는 하인을 한사코 마다하면 더 수상해 보일 터라, 막동은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로 닫았다.

흙길을 따라 풍곡현 본읍으로 향하는 길.

이번에는 막동이 앞서 걷고, 보따리를 멘 구렁이가 반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어제 아침 숭례문 밖을 나설 때만 해도 지게를 진 막동이 나리의 뒤를 쫓았는데, 하루 만에 구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막동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춰 구렁이 뒤로 가려다 멈칫하자, 뒤따르던 구렁이가 혀를 차며 키득거렸다.

"어사는 그리 안 걸어. 이히."

구렁이의 놀림에 막동은 머쓱하게 어깨를 펴고 다시 앞장섰다.

그러나 한낮이 되어 풍곡현 어귀에 들어서자, 두 사람 사이의 실없는 웃음도 뚝 끊겼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논바닥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말라붙어 있었고, 초가지붕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기우뚱했다.

길가에서 빈 그릇을 두 손으로 든 아이 하나가 흰 도포를 입은 막동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걸음을 늦추고 아이를 돌아보던 막동의 손이 저도 모르게 제 배 위로 올라갔다. 어젯밤 사랑채에서 삼켰던 갈비가 목구멍에 걸린 듯, 장난기 있던 막동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풍곡현 관아 대문 앞은 세곡 자루를 진 백성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문 앞에서 아전이 백성들의 쌀을 되로 재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조작된 큰 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쌀자루를 내밀자, 검은 전립에 붉은 술을 달고 남색 옷을 입은 사령이 육모방망이를 쥔 손으로 노인을 거칠게 밀쳐 냈다.

"한 말이 안 되잖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노인이 넘어지며 터진 자루에서 흰 쌀알들이 흙바닥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쏟아진 쌀 앞에 멈춰 선 막동은 노인과 관아 대문을 번갈아 보았다.

"어이쿠, 나리… 그냥 지나가시는 게…"

뒤에서 구렁이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흙바닥에 엎드려 맨손으로 쌀알을 쓸어 담던 노인이 사령의 거친 발길질에 다시 고꾸라지는 순간, 막동의 몸이 먼저 움직여 노인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찰나, 등 뒤에 서 있던 구렁이가 슬쩍 막동의 등을 떠밀었다.

"어, 어어?!"

중심을 잃은 막동이 사령들 한복판으로 굴러 들어가며 쌀자루 위로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막동의 양팔을 꺾어 쥐고는 관아 대문 안쪽 마당으로 끌고 들어갔다.

관아 마당 한복판, 흙바닥에 거칠게 무릎 꿇린 막동 위로 사령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댓돌 위 이방과 사령들이 찌그러진 갓을 쓴 막동을 내려다보며 호통쳤다.

"웬 놈이냐!"

겁에 질려 말이 나오지 않던 막동의 머릿속에, 어제 아침 느티나무 아래서 자기가 나리에게 했던 말이 종소리처럼 울렸다.

'고을 사또들도 저거 한 번 보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떤다길래…'

떨리는 손이 도포 품속으로 들어가 차갑고 묵직한 구리 마패에 닿았다. 마패를 꽉 쥐자 손의 떨림이 멎었다.

막동은 앞에 선 사령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삐뚤어진 왼쪽 송곳니가 살짝 보이도록 씩 웃으며 품에서 마패를 꺼내 번쩍 치켜들었다.

"나? …암행어사다."

막동이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반말이었다.

구리 마패 위 다섯 마리 말이 햇살을 받아 번쩍이자, 기세등등하던 관아 마당이 단숨에 얼어붙었다.

막동의 몇 걸음 뒤, 관아 대문 문간에 서 있던 구렁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이히히히."

NEXT EPISODE · 03 약 24분 · 공백 포함 12,234자
제3화. 고개를 들라
풍곡현 관아 마당에 바람 소리마저 뚝 끊겼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막동의 손아귀에서 둥근 구리 패 하나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번뜩였다. 손때와 흙먼지가 엉긴 구리 표면 위로 또렷이 돋을새김 된 다섯 마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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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ERIFICATION · 정조 18년 (1794) 사료 고증

가짜 어사 —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 및 삼정(三政) 문란 고증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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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행어사 임명장 세트(봉서·사목·마패·유척): 어사로 임명된 당하관 문신은 승정원에서 봉서(封書: 출두할 고을 지명이 적힌 밀봉 문서), 사목(事目: 감찰 수칙서), 마패(馬牌: 역마 징발패), 유척(鍮尺: 도량형 및 형구 검수용 놋쇠 자)을 하사받았다.
  • 봉서 개봉 원칙(남대문 밖 개봉): 봉서 겉면에는 '도성 문(숭례문 등) 밖에서 개봉할 것'이 명기되어, 어사 본인도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암행 목적지(경기 풍곡현)를 알지 못했다.
  • 세곡(稅穀) 수탈과 되·말(斗斛) 조작: 조선 후기 지방 아전(호방·이방)들은 세곡 수납 시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큰 되를 사용해 백성들의 쌀을 초과 징수(모곡)하고, 어사 감찰 시에는 정상 규격의 되로 바꿔치기해 유척 검수를 피하려 했다.